BOOK2011/03/07 22:05


참 부러운 사람을 순서대로 꼽자면

1. 정말 대단한 필력의 소유자. 여기서 필력이라함은 단순한 글빨이 아니라 넓고 깊은 지식, 지혜, 유머감각 포함.
2. 보이는걸 복제하길 넘어서, 복잡한 머리속을 ‘그림’으로 뚝딱 바꿔내는 사람.

나는 이렇다.
(아니, 그 외에 본능을 극복하는 인간들, 로또 맞은 인간들 등등 많긴하다)

그리고 이 두가지를 후천적으로 배워 이루려는 노력은 확실히 한계에 봉착하고야 마는, 그야말로 천부재능이라는 믿음이 깊었다.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무척 많겠지만 암튼 나는 그렇다.
타고났거나, 아니면 적어도 수십년을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서 위태롭게 자라야 가능하다고 생각해온거지.
음, 그나마,
그림 그리는 능력은 노력에 의해 도달할 수 있는 상한이 필력보다는 좀 높다고, 내세울 만한 근거는 없지만,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 일단 주위에 그림 잘그리는 어느 아이가 ‘배우면 다 된다’고 말했고;;; (야, 그건 니 입장이라고!), 전혀 그런 친구가 아니었는데 졸업후 한참 지나 갑작스레 미대에 진학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기도 하기 때문이다.

난 그림을 잘 그리고 싶다. 그다지 평탄치만은 않은 삶이 쌓여오면서 글만으로는 내속에서 폭발하는 뜨거운 무엇을 감당키가 마뜩잖아 그런것 같단 말이다. 그래서 이제까지의 내 신념에 따라, 내게 타고난 기본기가 있는지를 먼저 알아내야만 했다.


그림.
똑같이 베끼는, 완전히 실물처럼 그려내는 그런것 말고, 연필로 아무렇게나 죽죽 긋고 목탄 같은걸로 아무렇게나 쓱쓱 칠한것 같은데도 뭔지 모르게 감동을 주는, 속을 틔우는 느낌있는 그림을...
아...
그림에 대한 욕망이 최우선이라면 당장 미술학원에 등록하고 싶지만(어떤 아이가 ‘배우면 다 된다!’고 했단 말이야!),,,
도달키 힘들지만 애써보고싶은 꿈 몇개가 더 우선순위에 포진해있고, 직장에 매여 시간도 모자란다.
(물론 시간이 모자란다는 말처럼 큰 핑계는 없다. 잠을 8시간씩 처 자잖아?)



재작년엔가 한겨레 문화센타에서 인체크로키 수업을 몇번 들은적이 있었는데,
(먼저 이미지관리 하고 시작하자면) 난 여러가지 수업을 자주 들으러 다니는데 특별한 일이 아니면 절대 빠지지 않고 지각도 절대 하지 않으며 필기는 기본에 녹음, 녹취;;, 도청;;;;;, 하다못해 순간암기까지 시도하는 좀 모범 수강생인데ㅋ 어쩐지 이 수업은 세번인가 듣고 환불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림을 그토록 그려보고 싶었는데도, 그리고 인체는 그림의 정점이라고 생각했음에도 웬일인지 그랬다.
환불받은 돈으로 오뎅질을 하면서 이렇게 된 이유가 뭘까 한참 생각했었는데, 확신은 힘들었지만, 그 수업이 재미없게 느껴졌던 큰 이유는 ‘크로키’에 있었다고 잠정 결론을 봤었다.
처음 미술수업이란걸 들어보는데, 특징을 순식간에 포착해서 뚝딱 그려내야 하는 그 조급함이 내가 욕망던 느긋한 예술과는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2년 후, 다시 시도.
어쨌거나 독학(이라고까지 하기엔 턱도 없지만)으로라도 그림공부를 시작했다.


책을 샀다.
학원에 다니는 정도의 노력까진 할 상황이 안되고, 드로잉에 관한 기본 책이라도 일단 읽어보면, 이 길도 동시에 걸어야 할 길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뭔가를 만날것 같았다.


백남원 이라는 분이 지은 <드로잉의 정석>.
서점 카테고리에서 별 기대 없이 대략 선택한 책.
그리고.
그 어느 소설보다 재밌게 휙휙 읽어내려갔다.

그림그리기 강의 책을 보고서 독후감을 쓸 계획은 전혀 없었는데, 이 책은 기꺼이 그렇게 만들었다.
이 책은 단순히 그림그리는 기본 기술을 알려주는 차원을 넘어, 뭔가 인간적인 감동마저 주었다.
저자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를 무척 궁금하게 만들었다.
그림을 처음 그리려는 사람에게 책으로나마 기초를 잡아주고, 비기너에겐 그 무엇보다 절실한 '그릴 수 있다는 용기'를 주기 위해 굉장히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
마치, 안팔려도 좋으니 진심을 전하겠다.는 의지마저 느껴진다고나 할까.


이 책은,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말함과 동시에 단번에 할 수는 없음을 거듭 강조한다.
‘영어 5주완성’ 따위의 책들이 출간되고 그게 실제로 가능할거라고 믿는건지 잘 팔리기까지 하는 세상에, 언어를 배우는것 보다는 훨씬 가능할것 같은 ‘그림 그리기’를 두고 그렇게는 안된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다.
그 말이 절망이 아닐 수 있도록, 당신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연이은 말 또한 얼마나 진중하고 다정했던지, 순간, 천부재능에서 그리기를 빼버릴 지경이었다.


머리말 서문의 맨 첫줄이 이렇다.
“드로잉, 한달 만에 완전 정복하기”
만약 이 책 제목이 저랬다면 무척 매력적이었겠죠? 하지만 가당치 않은 일입니다.


만일, 그림 그리는 구체적인 기술을 배워보려고 이 책을 구입한 나에게 이런 관념적인 이론만 늘어놓았다면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결국은 못마땅했겠지만, 여기선 정말로 드로잉의 ‘정석’이 될 만한 기본기들을 사물의 원리와 인간 심리마저 기초해 아주 설득력있게 하나하나 가르친다.
설명이 너무나 과학적이어서, 스토리를 가진 그 어떤 책들보다도 ‘아~~~, 우와~~~, 이야 그렇구나!, 아 맞다.., 그렇지!’ 를 자주 말하게 한 책이다.

올해 일주일에 하나씩 아무거나 그려보겠다는 계획을 세우곤 몇번 실천해오는 중이었는데, 말씀대로, 무작정 많이 그리기만 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나름 괜찮은것 같다고, 소질이 보인다며 혼자 우쭐했던 그림이 엉터리로 보이게 해주었는데 기본이 쏙 빠져있어 이대로는 아무리 무턱대고 계속 그려봤자 발전이 더디겠단걸 진심으로 느꼈다.

책을 덮자마자, 선생님 뒷조사부터 해댔는데 웹에서 찾아볼 수 있었던 그분의 작품들에 역시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단순한 그림 ‘기술’을 넘어 감정을 움직이는 무언가를 품은 그림들이었다.
정말이지 이 분 찾아가 수업을 꼭 한번 듣고 싶다.


성공적인 나의 첫 미술교과서.
아무렇게나 집어 든 책에서 원래 목적 밖의 다른 많은걸 한꺼번에 얻은듯하다.
나, 그림이 정말정말 그리고싶어졌어!!!



+ 예시로 들어있는 많은 작품들 중에 정말 감탄했던 한 작품. 나 정말 이런걸 그리고싶어ㅠㅜ
한수임 作


어쩜 저렇게 쉭~ 그린것 같은 할아버지가 저토록 감동일수가 있지!
양푼에 머릴 처박은 똥강아지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느낄 수 있어!



+ 저자인 백남원 선생님 작품.을 찾아보다가 블로그를 발견했다. 유레카ㅋ
마구 가져다 실을 순 없다. 가서 보십시다~!
http://blog.naver.com/100none





+ 그리고 나름 자만했던 내 작품 -_-;; 쪽팔리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내가 그리고픈건 이렇게 고대로 옮기는 식이 아니었는데 다른 어떤 방법을 알 수 없었기에 무척 답답했다. 이제 이론으로나마 꽤 후련해졌고.



 

드로잉의 정석 - 10점
백남원 지음/성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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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글도 그림도 욕심만 있지 어느것 하나 기본의 기본도 안 되있는 전..
    마냥 자책만 한답니다.
    '으이구 멍청아 이게 글이냐, 그림이냐?'
    그나마 악기는 계속 도전 중인데 점점 재미가 붙어 즐겁습니다. ^^
    님께서도 즐거우시기를!

    2011/03/07 23:04 [ ADDR : EDIT/ DEL : REPLY ]
    • 꺅! 제가 그림만큼이나 악기도 원하고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셨군요!ㅠㅜ
      저는 피아노가...너무나;;;;
      생각나눔님도 화이팅!

      2011/03/08 17:44 [ ADDR : EDIT/ DEL ]
  2. tera

    헐..
    블로그 처음부터 읽어내려오다, 뭔가 볼게있어 스크롤바를 올렸다 내리는 순간, 순간 눈에 휙 꽂히는 단어
    '드로잉의 정석'?
    일생? 아마도;; 그림 그리는것에 관심만 있었지 실행하지 않았던터라 근래엔 미술학원을 다녀볼까..도 생각했었는데 님의 글속에서처럼 그러그러한 이유;;와 실행력부족;;; 등으로 머릿속에만 있었던 그 열망을 순간 확 불질러 주는 군요..
    당장 구매해서 봐야겠습니다.

    근데 댓글을 보곤 저랑 비슷한 점 발견.. 예술쪽에 관심이 많으신듯..
    저도 악기는 뭔가 하나 꼭 해보고 싶은데..
    악기를 멋지게 다루는 사람들을 보면 참, 뭐랄까.. 부러움과 아름다움까지 느끼는데..
    우리딸은 꼭 피아노를 칠 줄 아는 아리따운 아가씨가 되길 바라는 아빠로서
    합주를 하려면 저도 뭔가를..; 흠;
    한때 트럼펫이 멋져서 없는 돈에 중고를 사서 혼자 열씨미 연습해 터득한 도레미파솔라시도 내기 -_-;;;(덕분에 입술에 둥그런 피스 자국으로 입술이 두툽해지는 부작용이 ㅠ.ㅠ)
    이젠 어디로 갔는지 그 흔적조차 모를 내 트럼펫;;;;;ㅠ.ㅠ;
    전 플룻을 배워볼까..하는;; 쿨럭; 뭐든 끝을 잘 못보는 요놈의 성격때문에 전 저 자신을 이기는 순간, 그때가 제대로 악기를 다루게 되는 때가 되지 않을까..생각해 봅니다;

    2011/08/19 13:25 [ ADDR : EDIT/ DEL : REPLY ]
    •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_^
      저도 이것저것 하고싶은것만 넘쳐나고 하나를 진득하게 하질 못하는게 저주스러운데ㅋ 그래도 tara님은 저보다는 실천력이 훨씬 강하신것 같아요. 우짜든동 화이팅입니다ㅋㅋ!

      2011/08/21 14:20 [ ADDR : EDIT/ DEL ]
  3. tera

    다음에서 드로잉의정석 으로 검색해 보니 이 포스트의 그림들이 뜨네요 ㅎㅎ(물론 알고 계시겠지만..)

    2011/08/19 13:34 [ ADDR : EDIT/ DEL : REPLY ]
    • 헉! 제 졸작도 뜬다는 말씀이시군요.. 우짜쓰까ㅠㅜ

      2011/08/21 14:20 [ ADDR : EDIT/ DEL ]
  4. 홍길동

    오, 그림좀 그려보고싶어서 교재 찾다가 왔습니다. 이책 땡기는군요. 이걸로 해야겠네요. 감사합니다^^

    2012/02/12 15:00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