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2010/02/21 11:50



대학 졸업반때 지도 교수님과 논문조 여럿이 모여 회식하러 갔다. 가난한 대학생들이 자주 먹을순 없는 정도의 고기집이었다.
고기가 아주 질겼다. 교수님은 표정에서 약간의 짜증을 풍기면서 이내 좀 끗발있어보이는 아주머니를 불렀고 우린 긴장했다.
그리고 교수님이 입을 뗐을때 나온 말은 이랬다.

“아 사장님, 제가 요즘 이가 좀 안좋아서 그런데 고기가 좀더 부드러운게 있으면 좀 바꿔주시겠습니까?”


교수님의 이 대사는 티도 못내고 고기만 씹어대던 나를 감탄케했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말하는 방식의 중요함을 문득문득 일깨우고 있다.
그때의 감탄은 ‘와~ 교수님 디게 착하다, 예의바르시다~’ 이거였고 지금은 좀 다르다.
교수님은 순수하게 상대의 기분을 생각해서, 예의를 차리려고 저렇게 에둘러 말한것만은 아니다. 결국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얻기위해 상대방의 기분까지 요리할 수 있는 어법으로 전략적인 대처를 하셨던것이다.

처세, 인맥구축, 인간관계 관리의 중요함이란.. 험한 삶을 손해안보고 약삭빠르게 살아내기 위해서라도 설명이 필요없을 만큼이고, 이런것의 중요함을 스스로 느끼게 되는게 어른됨, 늙어감의 척도일것이다.
처세에 관해 글로 설명해주는 것들을 좋아하지 않지만 제목과 뻔한 서평들에 낚여서 읽은책이 몇권 있긴 하다. 그런데 특별히 삐딱하게 마음먹지 않는이상 읽는 동안이야 자기성찰의 시간이겠지만, 대부분은 그걸 다 적절히 섞어 한권을 만들어도 될만한 성공한 인생선배들의 ‘구구절절이 좋은 말씀들’이다보니 긴 여운은 없다.
표본이 얼마 없어 안됐지만, <데일 카네기 인간관계론>은 확실히 좀 다르다. 구체적인 예들로 이뤄져있어 구태의연하지 않고 실감이 난다. 1936년도에 씌인 이후 지금의 우리에게도 거의 무리없이 적용될만큼 “그거슨 진리”인 이야기들이다. 밑줄 그으면서 읽는 습관을 갖기 전에 본 책들을 틈나는대로 다시 읽으면서 줄을 긋고 있는데, 대부분의 그런 재탕 책들이 처음보는것처럼 새로운데 이 책의 구체적인 사례들은 퍼뜩 생각이 났다.

소제목들은 어쩌면 뻔하다. 무슨 인간관계의 만병통치약인듯, 이대로만 하면 인기만빵 초능력인간이 될것처럼 약간 유치한 느낌까지 들 정도다.

어디서나 환영받는 사람이 되는 비결
좋은 인상을 주는 방법
대화를 잘 하는 사람이 되는 쉬운 방법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법
사람들을 단숨에 사로잡는 법
상대방을 설득하는 12가지 방법
반감이나 반발을 사지 않으면서 상대를 변화시키는 9가지 방법
비판하고 원망받지 않는 법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7가지 비결

이런것들인데, 제목엔 일단 냉소 한번 해줘야겠지만 정말로 기본 원리라고 할 수 있는 방법들이 제시돼있어 쓸모있다. 그게 모든 상황에 다 들어맞아 효과가 나는것이 아닐 뿐이다.ㅎ

결국은, 거의 ‘말’에 관한 방법론인데, 내 뜻을 전하려 할때, 내 물건을 팔고자 할때, 고객들의 피드백을 받고자 할때, 투자를 받고자 할때, 부탁을 거절하려 할때, 쫄따구를 엄하게 꾸짖으려 할때 등등등의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나를 만나지 않으려는, 내 일에 협조할 생각이 없는, 나와 논쟁해 이기려고 단단히 맘먹은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고, 후환을 사지 않고 궁극의 목표를 취할 수 있게 자알~말하느냐 하는 얘기다. 못되게 말하자면, 사람의 심리를 훤히 들여다보곤 교묘하고 티 안나게 잘 낚아서 내가 원하는걸 효과적으로 얻어내는 이기적인 인간관계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뭐 꼭 내 목적없이 순수하게 상대방을 칭찬하는 것이 그 자체로 숭고한 일이기도 함은 물론이고.)
이 과정에서 다양한 직업별, 상황별, 역사적인 순간과 인물의 사례들까지.. 살갗에 와닿는 재미있는 사례들이 많아 책장도 술술 잘 넘어간다.


다만 한가지, 삐딱하게 짚고 싶은게 있다면,
논쟁하지 마라, 적을 만들지 마라, 남에게 상처주지 마라. 의 얘기들인데.. 물론 이건 상대방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원칙적으론 당연히 맞는 얘기들이긴 하다. 개에 물렸다면 그 개를 죽이더라도 내게 상처가 남는다는것이다.
펜 생명보험사는 보험 판매원들에게 명확한 기준 하나를 제시해 지키게 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Don’t argue!이다. 이건 고객과 판매원의 관계이니 고객과 논쟁해 이긴다 한들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전혀 없으니 판매원들이 자기 자신의 실적을 위해서 논쟁하지 마라는 것이다.
하지만 논쟁의 종류와 목적은 여러가지가 있으니 결론 없는 논쟁조차 필요할 때가 있다는 생각이다.

카네기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논쟁에서 이기는 방법은 단 한가지 밖에 없다. 그것은 논쟁을 피하는 것이다. 방울뱀이나 지진을 피하는 것처럼 논쟁을 피하는 수밖에 없다. 거의 언제나 논쟁은 양측 참가자 모두가 이전보다 더 확실하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끝난다. 논쟁으로는 이길 수 없다. 지면 그냥 지는 것이고, 이겨도 지는 것이다. 여러분이 상대방 논리의 허점을 지적해 상대방을 묵사발 낼 정도로 이겼다 치자. 상대가 제정신이 아니라는것을 증명해냈다고 치자.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여러분 기분이야 좋겠지만 상대방은 어떻겠는가? 여러분은 상대방에게 열등감을 느끼게 했고, 상대방의 자존심을 구겨버렸다. 상대방은 여러분의 승리에 이를 간다.


음,,, 그렇기 때문에 후환을 사지 않기 위해서 논쟁 자체를 피하라는 것인데, 저 말속의 “여러분 기분이야 좋겠지만”이  ‘단순한 희열’의 가치를 너무 무시하고 있다.하하하.
상대를 설득하려는 목적이라면 논쟁이 소용없으니 정력낭비 할 필요 없겠지만 그럼에도 논쟁을 하는 것은 단순히 나의 희열을 위해서일수도 있는데 그 가치를 과소평가 하는것이 싫다.
개에게 물리면 그 개를 죽여도 상처가 남지만, 개의 입장에선 물고도 안죽을 수도 있으니, 아니 물고나서 죽임을 당할지언정 그 인간이 너무 싫으면 물어버려도 평생 상처를 남길 수 있으니 꼭 손해만은 아닌것이다.ㅎ
단순히 내 기분이 좋기 위해서, 상대방에게 열등감 느끼게 하고 이를 갈게 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논쟁할 수도 있는것이다. 사소한것 하나에 목숨거는게 인간이다.

100분토론 게시판에 이런글들이 꼭 있다.
이렇게 자기주장만 하고 싸울거면 뭐하러 토론을 하냐는.
토론을 상대방을 설득하는걸 궁극의 목표로 한다면, 그런 공개토론은 거의 무용할것이다. 누구든 자기 생각을 순순히 바꾸지 않는다. 더구나 처음부터 독을품고 나와앉아 대치한채 ‘논리’를 주고받는 토론자리라면 말할것도 없다. 토론 프로그램에서 누군가 상대방의 논리에 설득되어 아 그렇군요 하면서 자리를 옮기는 장면이 연출된다면 우주토픽감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철벽대치 토론도 유의미한 역할이 있는건, 아직 입장을 정하지 못한 사람들을 설득해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세력을 키우기 위해서, 무지한 사람들에게 실상을 알리고 입장을 정하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상대방을 ‘논리’로 설득해서 생각을 바꾸게 하려는게 아니라 날카롭게 공격이라도 해서 깔아뭉개줌으로써 속이라도 시원해보자, 지켜보는 내편인 사람들에게도 카타르시스를 주자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솔직한 용도이지 않을까.
이건 내가 열받아 죽을것 같으면서도 정치인들이 나와 앉은 토론프로를 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거의 유일한 이유일수도 있다. ‘우리편’의 패널들이 일단 말빨쎈!인물들로 총알장전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MB편’ 사람들을 보기좋게 묵사발이라도 내서 가슴이라도 뻥 뚫리게 해달라는 부탁인 것이다.


무조건 논쟁하지 말라! 라는 얘기들만 빼고, 이 책은 아주 훌륭하고 쓸모있다!!!

데일 카네기 인간 관계론 - 8점
데일 카네기 지음, 강성복.정택진 옮김/리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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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댓글입니다

    2010/02/22 12:00 [ ADDR : EDIT/ DEL : REPLY ]
  2. 비밀댓글입니다

    2010/02/22 13:28 [ ADDR : EDIT/ DEL : REPLY ]
    • 푸하ㅋㅋ 그게 닫는 따옴표는 원래 없는데... 티스토리 글쓰기 에디터가 원래 그렇더라고~ 나도 불만이얌ㅋㅋ

      2010/02/22 16:09 [ ADDR : EDIT/ DEL ]
  3. 글 너무 재미있게 읽으셔서 소름이 돋았네요ㅠ ㅎㅎ
    블로그로 트랙백해갑니다 ^^

    2010/06/22 10:40 [ ADDR : EDIT/ DEL : REPLY ]